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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르타 무케르지의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는 제목만 보면 암이라는 질병의 발생과 치료법의 발전을 다룬 의학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암이라는 질병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사회가 진실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해관계와 확신, 불확실성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유방암 치료의 역사였다. 당시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핼스테드는 암이 국소적으로 시작하여 주변 조직으로 확산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근치적 유방절제술을 확립했다. 유방뿐 아니라 가슴 근육과 림프절까지 광범위하게 제거하는 이 수술은 당시로서는 가장 과학적이고 적극적인 치료법으로 받아들여졌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암세포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조직을 최대한 제거한다는 논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암은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전신으로 퍼질 수 있으며, 수술 범위를 넓히는 것이 반드시 생존율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지나치게 공격적인 치료였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된 치료법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만약 기존 치료법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새로운 치료법과 비교하는 임상시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상황은 매우 복잡해진다. 어느 치료가 더 나은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실험군 또는 대조군에 배정되는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결국 환자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은 생각보다 훨씬 느리게 발전한다. 진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실을 검증하는 과정이 시간과 희생, 그리고 윤리적 갈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환자들의 경험과 희생이 축적된 뒤에야 기존의 상식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담배 산업과 폐암의 관계를 다룬 부분 역시 비슷한 문제를 보여준다. 이미 상당한 과학적 증거가 축적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 산업은 흡연의 안전성을 입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의심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이는 과학적 논쟁이 아니라 사회적 인식의 문제였다.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워지면 사실에 대한 확신 자체를 흔드는 방식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롭게 느낀 점은 이러한 모습이 현재의 AI 산업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 AI를 둘러싼 논의 역시 극단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에서는 AI가 수년 내에 대부분의 지식 노동을 대체하고 산업 구조 전체를 바꿀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AI가 결국 과대평가된 기술이며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암 치료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은 미래에 대한 확신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핼스테드 역시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 역시 최선의 과학적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담배 산업 관계자들 또한 자신들의 논리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가진 정보와 환경 속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AI 산업에는 개발자, 기업, 투자자, 규제기관, 학계, 사용자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AI의 가능성을 과장하고, 어떤 사람은 AI의 위험성을 과장한다. 어떤 기업은 기존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변화를 늦추려 하고, 또 다른 기업은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미래를 앞당겨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진 확신들 중 상당수가 미래에는 틀린 것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암 치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인간은 종종 증거보다 신념을 오래 붙잡고, 사실보다 이해관계를 먼저 고려한다. 그리고 그 현상은 특정 산업이나 특정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회가 가진 본질적인 특성에 가깝다.
아마도 미래의 역사가들은 지금의 AI 시대를 돌아보며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가.”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는 암에 관한 책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진실에 접근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점에서 이 책은 과거의 의학사가 아니라 현재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 확신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미래에도 여전히 사실로 남아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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